세계의 아날로그 마을을 가다
영국 남서부 끝자락 마을 토트네스(Totnes)에는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걸어서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만 시골 마을이지만 300년도 더 된 건물이 60채가 넘는 고풍스러운 동네다.
마을회관에 장이 섰다. 흩뿌리는 비도 아랑곳없이, 초등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캐럴을 합창했다. 엘리자베스 시대 의상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피리 선율에 맞춰 춤을 추고 할아버지와 소년이 목검을 휘두르며 전통 스텝을 선보였다. 주말이면 동네서 자주 볼 수 있는 주민들의 거리 공연이다.
그런 예스런 마을의 번화가 ‘하이 스트리트(High Street)’에 몰려 있는 상점과 식당마다 ‘그린(green)’, ‘유기농(organic)’ 간판이 붙어 있다. 주민 8000명이 사는 이 소박한 시골 마을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곳, 한국에서도 21세기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로 각광받기 시작한 ‘웰빙(well-being)’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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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트네스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전통의 뿌리를 이어가며 정서적‘웰빙’을 추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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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짐을 싸서 모여든다.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를 팔아치우고 이곳을 찾아온 요가 선생도 있고, 런던서 옮겨온 아이스크림 제조인도 있다. ‘그린 파이버’는 유기농 면(綿)으로 만든 아기옷·속옷·양말·이불 등으로 유명한 곳. ‘티클모어 치즈가게’ 주인 새리 쿠퍼가 만드는 전통 치즈도 명성이 대단하다.
하이 스트리트에서 꺾어 들어간 콜린스 로드. 수백년 된 대장간을 개조한 ‘포지 요가센터’가 있다. 남녀 10여명이 몸을 구부렸다 폈다 스트레칭이 한창이다. 쾌적한 환경과 뛰어난 강사진 덕분에 이곳은 지난해 11월 인디펜던트지가 선정한 ‘영국·아일랜드 지역 10대 요가센터’에 이름을 올렸다. 이 작은 마을에서 영국 최고 수준의 요가센터를 차린 사람은 그레첸 캐플란-파우스트씨. 5년 전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를 팔고 이곳에 정착했다. 고객은 200여명. 1시간30분짜리 수업료가 7파운드다. “런던이었다면 3배는 더 받았을 거예요.”
유기농 아이스크림 업체 ‘로콤’의 피터 레드스톤 사장은 런던에서 이곳으로 왔다. 맥킨지사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며 성공이 보장돼 있던 도시의 삶을 미련 없이 버렸다. “런던에서는 건강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토트네스 인근의 농장을 구입해 낙농업에 도전했고 4남매를 기르며 15년 전 아내의 꿈이던 아이스크림 사업을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사가면서 찡그리는 사람 봤습니까?” 커피부터 생강 맛에 이르기까지 20여 가지 아이스크림 샘플을 권하며 레드스톤 사장이 말했다. “신선한 아이스크림을 팔게 돼 너무 행복합니다.” ‘로콤’ 아이스크림은 최근 한국 진출 제의도 받았다고 한다. “소박하고 느리게 산다지만 일은 더 많아요. 농장 일에는 출퇴근도, 주말도 없어요. 소가 어디 그런 것 봐주나요.” “힘들어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는 레드스톤씨는 “이 동네에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러 온다”며 “야채를 기르든 치즈를 만들든 간에 다들 장인(artisan)이 되려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토트네스는 ‘더 많이’ ‘더 빨리’를 목표로 돌진하는 시티 라이프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러 모여드는 마을이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런 토트네스 사람들을 가리켜 ‘AT’(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Alternative Type의 줄임말)라 부르며 “이 지역 주민 열 명 중 한 명이 AT”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이들의 ‘장인 정신’은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웰빙’과 연결된다.
이곳 리버포드 농장은 개인 소유로는 영국에서 가장 큰 유기농가다. 농장주 가이 왓슨씨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농장을 1986년 유기농으로 전환시켰다. 100여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일하는 리버포드 농장이 앞장서 토트네스에 들어왔던 ‘유전자 조작’ 식품업체를 몰아내기도 했다.
소박하게 살겠다는 토트네스 주민들은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원시적’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돈으로 서비스를 사는 대신 재주와 능력을 주고받는 방법이다. 청소나 요리를 해주는 대신 회계 서비스를 제공받는 식. 이런 ‘지역경제교환시스템’(Local Economy Trading System)은 1980년대 중반 토트네스에서 처음 시작돼 영국 곳곳으로 번졌다. 물론 이자는 없다.
‘웰빙 마을’에도 문제는 있다. 아로마 마사지 전문가들로 넘치지만 배관공 등 일꾼이 모자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수요·공급의 균형이 맞지 않아 삐걱거려도 정신만큼은 살아 있다”고 웃음짓는다.
토트네스는 왜 자석처럼 웰빙족을 끌어들일까. 주민들은 “토트네스는 수백년간 힐링’(healing·치유)의 고장이었다”고 말한다. 하이 스트리트 인근 주택가 한 구석에는 신묘하다는 샘물 ‘리치웰’(Leechwell)이 있다. 지금도 주위에는 건강을 기원하는 듯한 쪽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오래전, 나병 환자들이 치유의 희망을 안고 토트네스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마을 곳곳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담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동하도록 쌓은 것. 지금도 마을을 관통하는 다트 강변에는 명상 캠프가 늘어서 있고 하이 스트리트 한가운데 위치한 유서 깊은 책방 ‘악튜러스’ 게시판에는 침술과 각종 대안 치료법, 또 마사지 관련 안내문이 빽빽하다.
토트네스에 얽힌 신비한 내력이 역사든 전설이든 간에 이제는 나병 환자들 대신 도시에서의 소모적 삶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온다. 영국의 설문조사 기관 ‘핸리센터’는 얼마 전 “1990년대 중후반 영국 근로자의 6%가 소득을 포기하는 대신 삶의 질을 택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자발적 소박함’이 확산되면서 도시인들이 토트네스처럼 글로벌 급류에 휩쓸리지 않은 아날로그 마을로 이주한다는 설명이다.
하이 스트리트에 있는 아담한 구둣방 ‘그린 슈즈’에서는 직공 4명이 순수한 손작업만으로 신발을 만든다. 모두 여성이다. 리더 격인 앨리스 헤이스트씨는 대도시 액세터 출신 영문학도였지만 “사라져 가는 전통 기법으로 신발을 만들겠다”며 20여년 전 토트네스로 왔다. 처음에는 여성센터에서 조촐하게 시작했다. 어느 날 불이 나는 바람에 건물이 홀랑 타버렸지만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그가 재기하도록 돈도 빌려주고 격려했다고 한다.
손님의 발을 일일이 본을 떠서 수제화를 만들기 때문에, 알록달록한 가죽과 발본이 널려 있는 작업장은 동화 속 요정들의 구둣방 같은 아기자기한 분위기다. 이곳에서 12년째 여름에는 주로 샌들을, 겨울에는 부츠를 만들고 있는 스태프 크루츨리씨는 “우리는 유명 상표가 달린 신발 대신 사람들이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신는 신발을 만든다”며 “일주일에 30켤레 정도만 짓기 때문에 돈은 별로 못 번다”고 말했다. “손으로 하는 실용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다”고 3년차 수습 베키 마셜씨는 말한다. 이곳 단골들은 두고두고 신발을 수선해다가 신는다.
정서적 웰빙은 ‘뿌리 지키기’와도 관련이 깊다. 전통을 살리자는 의미에서 매주 화요일 토트네스 상인들은 엘리자베스 시대 전통 의상을 입고 하루를 보낸다. ‘오솔길 살리기 운동’도 한창이다.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 마을 사람들이 애용하던 옛길, 이제는 잡목에 가려 잊혀진 그 길을 살려내자는 운동은 마을의 신비를 보존하겠다는 노력이다.
지금도 리치웰에서는 샘물이 퐁퐁 솟아난다. 메마른 삶을 촉촉이 적시고자 하는 도시인들이 토트네스로 모여든다. ‘웰빙 마을’ 토트네스는 지친 현대인들에게는 작은 오아시스 같은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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