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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3/10/27
 

요즘 그의 책들이 읽고 싶다 (아래 내용은 퍼옴)

2008.12.16 07:41 | 잡동사니 그리고 책 구경 | Happymum

http://kr.blog.yahoo.com/gayong19/1383994 주소복사




헷세는 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슈바르츠발트의 칼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 헷세 Johannes Hesse(1847~1916)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지방청 의사로 일생 동안 인도와 중국의 철학과 정신 세계에 몰두했다.

그래서 부친은  헤르만에게 동양 사상의 연구와 그런 경향을 갖게 하였다.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 Marie Gundert(1842~1902)는 선교사이며 인도
학자였던 헤르만 군데르트 박사의 딸로 요하네스 헷세와 재혼하여
아델레 헤르만 Hermann (1875~1949), 파울 Paul(1878년 출생 직후 사망), 게르트루트 Gertrud(1879~1880), 마리 Marie(1880~1953), 한스 Hans(1882~1935)를 슬하에 두었다.





1890년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갔다.
라틴어 학교에서 신학교까지의 학창 시절은 『수레바퀴 아래서』에
잘 그려져 있다.
그는 우울증으로 간주되어 바트 볼에 있는 블룸하르트 목사의
병원에서 두달 동안 치료를 받았는데 6개월에 연상의 여인
오이게니 콜프 Eugenie Kolb에 대한 사춘기적인 사랑으로
고민하다가 자살을 기도한 후 슈데텐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3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부모들이 원하는 만큼의 정신적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11월
칸슈타트 김나지움에 입학하였다.



-그림 그리는 헤세의 모습

1904년 9살 연상의 마리아 베르눌리 Maria Bernoulli(1868~1963)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바젤의 학자 집안 출신으로 사진 아틀리에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덴 호수 근방의 가이엔호펜에서 1912년까지 살았다.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브루노 Bruno(1905~), 하이너 Heiner(1909~),
마르틴 Martin(1911~1968)이 태어났다.


헷세는 외면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고통과 신경 쇠약에 시달려 계속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여러 번 요양지에서 체제한 후 인도·싱가폴·
수마트라·실론 등으로 여행함으로써 내면적인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의 여행은 유럽으로부터의 도피, 동양에의 동경, 부부 갈등의
타개를 위한 것이었다.
1923년  정신신경증을 앓고 있던 첫부인 베르눌리와 정식 이혼을 하였다.

 

-니온 아우슬랜더, 그녀가 처음 헷세를 안것은 열네살 때였다.
<페터 카멘친트>를 읽고 몹시 감명을 받은 니온은 존경하는 작가에게
편지를 썼다.

'카멘친트와 같이 그렇게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 언제나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위해 가슴 근거리는 사람을 대하면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페터 카멘친트는 죽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그는 살아 있습니다...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
헤세는 소녀 니온의 가슴속에 우상이며 '신화'가 되었다.

두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그로부터 13년후인 1922년, 니온이 27세,
프레드 돌빈이라는 캐리커처 화가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니온은 헷세에게서 돌아가신 부친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니온은 점점
헷세에게 빠져들며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헷세는 당시 스위스 여류 작가인 리자 벵거 Lisa Wenger의
딸인 20살 연하의 어린 성악가 루트 벵거 Ruth Wenger와 열애에 빠져
니온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24년 헷세는 루트와 두번째
결혼을 하였다. 그들의 결혼은 얼마안가 파국으로 끝났다.
루트는 이혼소송을 제기하였다. 작품 <황야의 이리>, 시집 <위기>는
이때에 씌여져 그의 절망과 본능과 이성의 내적 투쟁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본능과 정신 사이를 흔들거리며 인생을 걷는다.
오늘은 현자, 내일은 愚者
오늘은 진심으로 신께 몸을 맡기고
내일은 뜨겁게 육신에 몸을 맡긴다

환락과 금욕이라는 두 참회자의 채찍으로
나는 내허리를 피가 빠져나가도록 찬다.
승려가 되기도 하고, 동물이 되기도 하며
생존의 죄가 나의 안에서 용서를 절규하고 있다.

두가지 길에서 난 죄를 짓고
두가지 불로 날 태워없애는 걸 막을 길이 없다.




-니온과 헷세


"지금 어느 부인이 빈에서 갑작스럽게 이리로 와 있소. 그녀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오. 나도 그녀가 좋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난 이 극적인
상황 앞에서 속수무책이오."
헷세가 친구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은 편지이다. 두번의 결혼 실패로
자신은 결혼생활에 부적격자라는 생각을 갖게된 헷세였지만 점점 니온의
열정에 감동하게 되었다.

1929년 헷세는 니온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 했다. 단 함께 살되 서로
다른 방에서 거처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무렵 헷세는 눈이 아주 나빠져서
책을 거의 읽을 수 없었다.
니온은 헷세의 눈이 되어 수많은 책과 편지들을 읽어 주었다.

이후 헷세가 사망 할 때까지 33년동안 니온이 읽어준 책은 자그만치
1447권, 일주일에 1권꼴인 셈이다.
 

-몬타뇰라의 집들 헷세 그림.
헷세는 마흔 살부터 거의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공동생활이 시작된 2년후 두사람은 정식 결혼식을 올렸는데 헷세는
이 결혼을 가리켜 '코에 고리를 꿰는 것'이라며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니온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결혼식 다음날 헷세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요...나의 새-나의 소년-비밀에 가득찬 마술사.
나는 다시 열네살로 돌아가 호두나무와 기둥 사이에 맨 해먹에 누워
당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당신을!
당신은 내게 애인이자 보호자이며, 이제는 남편이얘요, 당신은 내 인생에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 준 기적."


-헷세가 살던 Tessiner 풍경

그러나 니온의 기대와는 달리 헤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니온의 노력을 헷세는 거절하였다.
<나르시스와 골드문트>에서처럼 본능과 이성 간의 치열한 내적 싸움이
마침내 이성에 합일 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기 때문일까?
"당신이 내곁에 있는 것이 매우 고맙긴 하지만, 나 때문에 당신이 늘
희생하고 있다는 기분으로 사는 것 보다 차라리 혼자서 파멸하는 것이
낫겠소."
헷세의 이러한 괴로움에 니온은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서로 방해하지 않고 나란히 함께 살자고. 자신의 행동은 '히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단언 하면서.



-포르레짜 조망 (Blick nach Porlezza)

그후, 니온은 여행, 공부, 창작활동으로 결혼생활의 빈 부분을 메워
나갔다. 유복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의학, 언어학,
미술사를 공부했고 일찍부터 시, 소설을 써온 니온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 연구에 몰두하면서 그리스어와 고고학을 공부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은 일기를 씀으로서 달래었다.
니온의 일기는 결혼후인 1932년 3월부터 시작되고 있다.

"....시간도 유쾌한 기분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일상이 되어 H에게
속해 있다. 그의 류마치즘, 눈의 통증처럼...이는 명예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종 견딜 수가 없다."

-참고 : 실천 문학사출판,  세계사의 뒷 이야기 중


  '헤세부부의 기이한 결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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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온 아우슬랜더...

그녀에 대한 책들 좀 구해서 읽어 봤음

좋겠네...


아...인터넷의 힘...책 찾았다...





9. 니논 아우슬랜더-헤세의 생애와 예술(1895-1966)
“나는 예술이 아니라 단지 내 삶을 만들어냈어요.
삶이 곧 나의 작품이었습니다.”



절판되기 전에 사서 읽어야지...

http://kr.blog.yahoo.com/gayong19/trackback/10196/1383994
기본 토돌이 2008.12.16  10:32

올리신 글이랑은 좀 안 맞는 이야기지만..
예술가들이 여자들에게서 영감을 받고, 처자식 내팽겨치는걸 보고 분개하는건 아마 제가 유부녀가 되었기 때문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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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MyDaysInCan 2008.12.17  08:19

시대 관습의 굴레 이런 말 나오면,, 난 항상 현재에 살고 있다는거에,, 한번씩 감사한다는..
오늘 덕분에 헤세 의 시들을 좀 읽어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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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J1 2008.12.18  19:20

그냥 살짝 우울증이있었을 뿐인거 같은데, 저 시대에는 정말 정신병자 취급하구 병원에 들어가서 치료한다면서 동맥 자르고 (고호에 대해 읽다 알게 된 사실이에요) .. 그러면서 증세를 더 악화시켰던 거 같애요.
헤세는 기독교에서 바라는 금욕과 사람으로서의 일상적 욕구사이에서 많이 갈등한것처럼 보이네요. 아무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참 많은게 극단적이었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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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Happymum 2008.12.22  02:00

재원님...예술가들은 아주 예민하고 감성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거의 다
조금씩 신경증(???)을 가지고 있더라구요...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힘들어하고...그냥 평민(?)으로 행복하게 사는것이 가장
좋은것 같다는 생각도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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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Happymum 2008.12.22  02:11

마이데이즈님...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공간이 정말 저희들에게는 가장
좋은곳 이라고 생각 하면서 살아야 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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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Happymum 2008.12.22  02:13

토돌이님...이 책의 대부분이 말씀하신그 예의 경우에 해당이 되는것 같아요.
자기가 예술한다고 그 고뇌에 옆의 사람(거의 부인이나 애인) 힘들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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