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mum (gayong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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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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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속에 타오른 어두운 정열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의 짧은 생애를 살펴보노라면 그녀야말로 오로지 문학에만 몰두하다가 간 작가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연약한 몸을, 그것도 결핵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가진 육신을 30년간이나 지탱해 준 것은 오직 문학이라는 지주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더욱이 그녀의 대부분의 시가 발표할 목적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고, 말년 경에 발표한 작품마저도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작을 계속한 그녀에게 있어 문학은 비단 정신적인 지주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육체적인 생명의 양식이기도 했다.

에밀리의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는 아일랜드의 빈농의 집안의 아홉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초등교육을 마치고는 직공으로 일하면서 생활을 돕다가 독지가를 만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고 영국 국교파의 목사가 되었던 분이었던만큼 근검착실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브란웰은 콘월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 기숙하면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온 여성이다. 이들은 요크셔의 하츠헤드에서 결혼하여 장녀 마리아 (1813년)와 차녀 엘리자베드(1884년)를, 돈튼으로 옮긴 후 3녀 샬로트 (1816년), 장남 패트릭 브란웰(1817년), 4녀 에밀리(1818년)와 5녀 앤(1820년)을 낳았다.

이러한 부모에게서 에밀리는 침울하면서도 정열적이며 안정감은 덜하지만 웅변적이고도 기지가 풍부한 아일랜드적 성격을 물려받았고, 한편 호워드에 정착하면서 이와는 정반대로 정렬적이고 실제적이고 산문적이면서 고집스럽고 과묵한 요크셔적 기질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유전과 환경과의 현저한 대조는 그녀의 작품의 본질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을 특징짓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힘차고 자유분방한 격정과 절도있는 부드러움, 즉 격렬함과 감미로움이라는 두 개의 모순된 성격인 것이다.

또한 그녀의 부모와, 후일 동거하게 된 이모 엘리자베드 브라웰이 모두 메더디스트(Methodist) 교파와 관계가 있었던 까닭에, 에밀리는 교파 자체에는 아무런 호감은 갖지 않았으나 웨즐리가 주창한 독서와 연구에 의한 수양과 결부된 종교적 열정이 은연중에 어린 그녀의 인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뿐더러 한때는 문학을 지망하기도 한 아버지와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어머니는 에밀리로 하여금 일찍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만들었다. 그들은 설교집을 발표하기도 하고 논설을 기고하기도 했으므로 문선(文選)이나 표지 교정쇄의 정정이 브론테 자매에게는 낯익는 작업이었다.

1820년 4월에 브론테 일가는 호워드로 이사했는데 이 쓸쓸한 마을 호워드의 목사관이 에밀리 평생의 주거가 되었다.

호워드는 영국 북부의 요크셔의 웨스트 라이딩 한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방은 페나인 산맥의 기복이 히이드로 덮인 산악지대이다. 첩첩이 둘러싼 황량한 산과 벌판 때문에 가장 가까운 마을이래야 4마일의 시골길을 걸어가야 할 만큼 교통이 차단된 외딴 곳이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목사관을 둘러싼 자연 환경만이 황량한 것이 아니라 가정생활 자체가 냉랭했다.

이들은 호워드로 옮겨온 이듬해인 1821년 어머니 브론테 부인이 암으로 죽었다. 이때 샬로트의 나이 다섯살에 불과했고 에밀리는 세 살, 앤은 겨우 한 살이었다. 또한 1825년에는 큰언니 마리아와 둘째 언니 엘리자베드가 병사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와 언니를 잃은 어린 딸의 상대가 되어 주지 못했다. 가사와 아이들을 돌보아주려고 온 이모 엘리자베드 브란웰 역시 완고하고 편협한 메더디스트 신자였으므로 인정에 굶주린 어린아이들의 외로움을 달래줄 상냥하고 자비스런 여인은 못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에밀리는 자력으로 위안 거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관심은 우선 자연으로 쏠렸다. 그녀는 보랏빛 히드가 만발한 들판과 우뚝 솟은 검은 바위, 넓은 하늘에 한없이 뻗은 능선에서 미적 쾌감을 맛보았으며 이 쾌감이 그녀의 취미를 간결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인간의 침해를 받지 않은 야성미와 힘차게 거침없이 들판을 불어제치는 폭풍은 자유에의 동경과 도적적인 영감을 일깨워 주었다. 황야에 서면 모든 인습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샬로트에 의하면 과묵한 에밀리는 남성보다 강하고 어린아이보다 더 순진하며 그녀가 사랑하는 들꿩들과도 같이 황야의 젖을 먹고 그 품에서 자라나 황야의 자유를 숨쉬었던 인간이었다 한다. 그녀는 자기가 이토록 사랑한 황량하고 음울한 황야에서 장엄한 운율을 끌어내고 우주를 꿰뚫어보는 직감을 얻었던 것이다.

고독을 달래는 또 하나의 위안은 공상의 날개를 펴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오빠에게 사다준 열두 개의 장난감 병정이 공상의 세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4남매는 아프리카 해변에 글라스타운 왕국이라는 가공의 나라를 세우고 가지가지의 모험담을 산문과 시로 엮어 가공의 나라의 신문과 잡지라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이때 에밀리의 나이 여덟 살이었으며 그후로 그녀는 줄곧 이런 상상의 문학을 계속했다. 나중에 그녀는 동생 앤과 함께 북태평양상에 <곤달>이라는 이름의 상상의 섬을 만들고 이곳을 무대로 곤달 왕국의 이야기를 엮어냈다.

이때의 시가 1938년 《곤달의 시(Gondal Poems)》로 발표되었는데 《폭풍의 언덕》의 원형이라 할 만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에밀리는 다른 자매와 함께 여러 번 학교에 들어간 경험이 있으나 호워드의 황야를 떠나 있으면 언제나 건강을 해치는 까닭에 그녀는 주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책을 벗삼고 상상의 왕국을 지키며 시작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쓰고 싶어서 썼을 뿐 발표할 뜻이 없었으므로 샬로트가 우연히 동생의 작품을 읽고 그 박력과 독창성에 감탄한 나머지 발표할 것을 권했을 때 그녀는 몹시 화를 내기도 했다. 결국 샬로트의 설득에 이해 세 자매의 시집《커러와 엘리스와 액튼의 시집(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이 남성적인 필명 벨이란 이름으로 1846년에 런던에서 자비 출판되었다. 자매가 남성의 필명을 쓴 것은 여류작가에게 갖는 일반의 편견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50파운드의 비용이 들은 이 시집은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고 겨우 두 권밖에 팔리지 않았다.

시집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자매는 계속해서 글을 썼다. 샬로트의 첫 소설 《교수(The Professor)》, 앤의 최초의 소설《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ay)》와 에밀리의 최초이자 유일한 소설《폭풍의 언덕》이 완성되었다. 그 당시 요구되었던 조건인 세 권의 분량에 미달하여 1년 반 동안 끈기있게 여러 출판사와 교섭을 벌인 끝에 런던의 뉴비사에서 겨우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면 맡아주겠다 했다. 샬로트의 둘째 번 소설《제인 에어(Jane Eyre)》가 스미드 엘더 사에서 출판되어 대성공을 거두자 에밀리와 앤의 작품도 덩달아 여태 거절하던 뉴비사에서 출판되었으나 세인의 주목을 전혀 끌지 못했다. 오늘날 세계문학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그녀의 소설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인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더구나 에밀리는 내성적이어서 나타내기를 꺼려했으므로 그녀가《폭풍의 언덕》의 작가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제인 에어》와 같은 작가에 의해 씌어졌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제인 에어》로써 성공을 거둔 스미드 엘더사에게 세 자매에 대해서 호의적인 관심을 표시하기 시작하여 이들에게 행운이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 브론테가에는 불행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 세 자매는 힘을 합해서 생계 유지에 안간힘을 써야 했었다. 오빠 패트릭 브란웰이 가정교사로 있던 집의 안주인인 로빈슨 부인을 사랑하다 가정교사직을 잃고 쫓겨나자 정신 이상자가 되어 술과 아편에 빠져 마구 빚을 지는 바람에 주관리가 그를 찾아 목사관에까지 쫓아오는 형편이었으며 아버지 브론테 목사마저 백내장에 결려 수술을 받아야하는 처지였다. 모처럼 브론테가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으나 브란웰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1848년 9월에 드디어 죽고 만다. 오빠의 죽음에서 받은 심적인 타격과 장례 때의 무리로 인해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그녀는 그해 12월 19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투박한 목사관의 창 너머로 호워드의 자연을 지켜보며 오로지 문학의 세계에서 고독을 달래던 그녀는 의사의 내진도 복약도 자리에 눕는 것마저도 거부하고 끝내 소파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네이버 청소년 글쓰기 마당에서 참조.----------------------

중학교때 처음으로 제인에어를 읽었고
고등학교때 폭퐁의 언덕을 읽었다....그후 블론테 자매는 거의 내게 우상이였다.
세 자매가 유명한(?) 작가...한 집안에 얼마나 복도 많은 집안인가....
그러나 얼마후 그들이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그녀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힘들었는지
알고 부터 한쪽 가슴에 그들의 삶의 현장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고,
언젠가 텔레비젼의 문학의 고향을 찾아서(제목은 정확하지 않다)본 후에는 정말 한번 가보고 싶었다.

내가 그곳을 찾은 날은 아주 날씨가 고약 했다.
헐이라는 도시에서 일일관광버스를 예약하고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돌아, 작은 마을을 넘고 넘어서
도착한 정말 조그마한 마을. 그 마을의 중심에 선 교회의 목사관은 블론테 박물관.
괴퍅한 성격의 아버지는 모든 것과 담쌓고 살면서 자기 아집속에서 타협하지 않았고
자녀들에게 정도 주지 않았다...그때 읽은 박물관의 안내문에는 딸들의 결혼식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그곳은 영국에서 꽤나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어서 그녀들의 오빠가 즐겨찾던 펍은 관광객들로
발을 딛을수도 없고, 마을입구의 주차장에는 정말 많은 관광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정말 힘든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그녀가 이 동네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군.

오래동안 내 가슴에 남아 있던 불행했던 여류문학가들의 향기를 맡을수 있었던 그 여행.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삶을 마친 그녀들에게-----
다시 한번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http://kr.blog.yahoo.com/gayong19/trackback/12081/131378
기본 sheenne 2004.02.02  22:01

나도 중학교 방학숙제로 다이제스트판 "제인에어"를 번역하면서, 또
역시 그때즈음 TV영화로 "폭퐁의 언덕"을 보고 얼마동안 몽상같은 나날을 보낸 것 같다. 이팔청춘도 안된 어린 여학생의 가슴을 태운 히드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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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꾸꾸리 2004.02.03  02:10

어?? 언니 하워드에 가셨어여??
근데, 그 곳 날씨는 시종일과 그렇게 흐리다던데...
에휴~~ 어쨌든 좋으셨겠당~~ 저도 또 다시 가보고 싶은데.. 크흑.
그리고, 좋은 글 올려줘서, 잘 읽고 갑니당~~~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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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purumee 2004.02.03  12:24

제인에어...제가 참 좋아했던 소설이였어요. 몇번씩 읽었는지....책이 나긋나긋해질 때 까지...폭풍의 언덕도 인상깊었죠. 작가들의 고향을 직접 찾아보셨다니...부럽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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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유복스 2004.02.03  22:43

얼마나 다녀오신건가요? 모두다 함께 다녀오셨나요? 남은 사진있으면 조금만 공개부탁드립니다. 저희도 함께 감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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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Happymum 2004.02.04  06:52

정혜야, 나는 고등학교때 폭풍의 언덕을 읽고 애증이 어떤것인가를
배웠고, 히드리클리프의 캐릭터에 정말 뿅 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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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Happymum 2004.02.04  06:54

푸르메님, 언제 한번 유럽으로 배낭여행 오세요.
특히 영문학 하는 사람들은 영국으로 작가 순례를 많이 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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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Happymum 2004.02.04  06:55

유복스님, 그날 제가 카메라를 가져 가지 않아서 찍은 사진은 없구요.
혹시 그날 산 카드가 더 있는지 찾아 볼께요.
늘 답글 남겨 주셔서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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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Happymum 2004.02.04  07:08

은영아, 너도 참 다녀 왔다고 했지...
주변이 하이킹 하기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숙박을 하면서
주변을 하이킹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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