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기원 하면서 이 글을 적는다.
그녀는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다.
조그마한 키에 인상이 선해 보였던 그 친구는 나와 1학년때 같은반
이였다. 나는 학교가 너무나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때 솔직히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공무원 시험이나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도 재미 없었고,
친구도 많이 사귀지 못했다. 먼 통학거리를 매일 되집어 다니면서
한달만 더 다니고, 그만 두자라고....
어떻게 그애와 친구가 되었는지는 지금 기억에 없다.
그 친구는 공부는 중간쯤 했고, 집은 잠실 이였다.
어느날 방과후에 교정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주로 듣고 있었다. 그녀는 몇번이나 다짐을 받으면서, 이것은
비밀 이라고 절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자기 엄마가 집을 나갔고, 언니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집안 살림을 형제들 끼리 나누워서 살아 가고 있다고...
나는 커다란 비밀을 간직해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딱히
그녀의 비밀을 이야기 할 곳이 없었고, 그녀는 나를 신뢰 하기 시작
하면서, 많은 비밀(?)과 고민을 이야기 하기 시작 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집에 가기도 했고, 그녀가 우리 집에 놀려 오기도
했다. 그녀의 집은 아주 작은 시영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때도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방2칸 짜리라서 한방에서 여자 형제 4명이
다 같이 잔다고...
그녀는 공부를 잘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꿈이 있었고, 졸업해서
좋은곳에 취직해서 빨리 독립하고 싶어 했다. 한마디 가족은 그녀에게
힘든 무게 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주 작은 사장하나 나 하나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첫 월급을 탔다고,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었던 학교앞 근처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2천원짜리 돈까스를
사주었다. 그녀는 좋아 보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자주 전화를 해서 사장이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하소연을
했다. 정말 그만 두고 싶은데, 그만 둘수 없는 자기의 처지를
하소연 했다.
그렇게 그녀는 여러 회사를 전전했다. 그러면서 빨리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다고...
한번도 제대로된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어서, 누군가와
열열히 연애를 해서 행복하게 사랑하면 살고 싶다고...그리고 힘든
집안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그녀가 20대 중반쯤에 누군가를 만나기는 했다. 나이가 조금은
많은 남자 였는데, 열열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둘이서 꽤 좋아하는것
같았다. 남자는 청혼을 했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해에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버지는 반대했다. 올해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내, 환갑 잔치를 해야 하니까...
결정적으로 헤어진 이유냐, 그들 둘만이 알겠지만, 그들은 얼마후에
헤어졌고, 그녀는 많이 많이 힘들어 했다. 그리고 많이 많이 원망했다
가족들을....
우리는 직장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아니 솔직히 내가 많이 피해 다녔다. 그녀는 주로 토요일에 만나고
싶어 했는데, 나는 그녀만 만나면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
힘들고,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싫었다. 왜...너는 맨날 찡찡대면서
사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내가 용기가 없어서, 그녀에게 상처가 될까봐...
90년대 초반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났다. 아니 그녀가 찾아 냈다.
결혼 소개소에서....괜찮은 대학을 나오고, 괜찮은 직장(지금은 문을
닫았지만)을 다니는 키는 작지만 인상은 괜찮아 보이는 남자였다.
그녀는 솔직히 데이트를 하다가 보면 너무나 답답하지만, 자기를
좋아하는것 같고, 고등학교 나와서 대학나온 남자 만나는것 어려운데
그냥 결혼해야 할것 같다고...
하지만 그때 그애는 돈이 없었다. 가출 했던 엄마가 돌아 오면서
(엄마가 그녀가 어렸을때 계가 깨지면서, 그 충격으로 정신이 조금
이상 하시다고(조울증 같은것), 집을 이사 했고, 그녀가 집을 옮길때
아버지가 시집갈때 줄테니까 모아 놓은돈 달라고 해서 드렸는데
퇴직후에 집에 계시는 아버지가 무슨 돈으로....
어찌어찌해서 그녀는 결혼을 했다. 결혼식날 그녀도, 그녀의 언니도
많이 울었다.
신길동 어딘가에서 살았다. 시부모님과. 처음 몇년은 그럭저럭
잘 사는가 싶었다. 물론 결혼도 하고 시부모님과 같이 살아서
결혼후 만난적은 거의 없다.
원래 여자 친구들이라는 것이 자기가 힘들때 친구를 찾는다고
딸아이 낳고 살던 그애가 전화를 하는 횟수가 늘어 났다.
남편이 손지검을 하기 시작 했다고....그것도 맨정신에
더 열받는 것은 손아래 동서는 시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데,
시동생과 같은 직장 다니면서, 시댁 식구들에게 너무나 사랑을 받고
시동생도 아내를 완전히 공주 모시듯이 한다고, 때마다 선물에
꽃다발에....
자기는 시부모와 같이 살면서 많이 부딪치고, 남편이 손지검을 시작한
후에 시부모에게 하소연 하면....
"네가 맞을 짓을 해서 그렇지" 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분노 했다. 자기 딸이라고 그렇게 말 할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의 신랑...만난것은 몇번 되지 않지만, 별로 악해 보이지는
않았고, 일요일 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는 사람...
나는 그녀가 울면서 전화를 했을때, 정말 소리쳐 주고 싶었다.
야......너는 그리도 부모복도 남편복도 없니.....
하지만 그때 나는 결혼전 이였고, 이혼 하라는 말이 입안을 맴도는데
결혼도 해보지 않은 처녀가 어떻게 해줄 말이 없었다.
그냥 시부모님께 어떻게, 도움을 청해 보라는 말 밖에....
그녀는 계속 단돈 2백만원만 있으면 이혼해서 어디다가 단칸방 얻어서
아이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내가 그녀를 마지막 으로 본것은 나의 결혼식 날이였다.
원래 결혼식날 이라는 것이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 정신이 없는 날이고
그녀가 왔다는 것도 나중에 남겨진 사진으로....
워낙 정신 없는 상황중에 만나서 그녀와 그날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기억에 없다.
나는 결혼후 영국으로 왔고, 그녀는 드디어 분가를 했는데, 나는
연락처를 잃어 버렸다. 참, 그녀가 영국으로 편지도 했었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는 남편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 아이만 없으면
정말 도망이라도 가고 싶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영아....우리가 처음 만났던 17살에는 참으로 꿈도 많고,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는데...난 지금 하고 싶은것이 없어.....그냥 좀 편안하고
누군가에게 한번이라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
라고...
그리고 자기도 지금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주소를 적지 않았다.
그 편지가 6년전 받은 편지 였다.
생각이 꼬리를 문다고, 이곳에서 한국을 생각하고, 몇십년을 뛰어
넘어서 고등학교때, 그리고 직장 다니던 80년대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련한 과거쯤으로 기억되는 시간들 속에서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
아쉬움으로 그리움으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미움으로...
폭염의 런던에서 여고시절 비상금 탈탈 털어서 같이 떡볶기
사먹던 그 친구가 생각이 났고, 힘들게 살아 왔던 그녀가
지금은 많이 행복 하기를 다시 한번 기원하면서 이 글을 적었다.
그리고 이 긴 글을 읽는 어느 불로거 분도 그녀의 행복을
같이 기원해 주기를 소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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