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란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비극적인 인생을 마감한 모딜리아니만큼 인생이 미화되고 전설화된 작가도 드물다. 모디(모딜리아니)를 따라 오층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만삭의 임신부 잔느 에뷰테른 (Jeanne Hebuterne)의 순애보도 신화적 전설에 기여했겠지만, 화가가 죽고난 다음에야 그의 작품의 진가가 비로소 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모디가 죽기 삼년 전인 1917년, 파리에서 닭 한마리도 10 프랑에 팔렸는데 모디의 드로잉은 5프랑에 팔렸다. 밥값 대신 그림을 받은 어느 음식점 주인이 화가 나서 모디 그림에 국수가락을 내던졌다고 할 만큼 그의 그림은 과소평가 되었다.
가난에 쪼들린 그의 말로는 죽기 전에 애인 잔느가 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없을 만큼 비참했던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그가 죽은 지 이틀 후 그의 그림값은 갑자기 뛰어올라 15년만에 오십만 프랑이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그의 그림은 몇 천만 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비극적인 35년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성이 확실한 작품을 비교적 많이 남겼다. 항간에서는 누드 화가로 구설수에 오를 만큼 유명했지만, 그보다는 참신한 멋의 초상화가로 보는 것이 옳바른 평가이다. 그의 누드가 애호를 받는 것도 탄력있는 여성의 육체 때문이라기보다는 개성이 확실한 예쁜 얼굴 표정 때문이다.
외롭고 고단한 파리의 보헤미안, 모딜리아니
모디는 지중해 문화권에 속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1884년 7월 24일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다. 소학교 시절의 모디는 성적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림을 잘 그렸고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에 폐결핵까지 앓았다. 이 때에 앓은 결핵이 파리의 보헤미안 시절에 제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본격적인 미술수업은 1898년 리브른느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누드화에 특히 재능을 보인 그는 1902년 5월 7일 피렌체에 가서 아예 스콜라 디누도(누드학교)에 등록했다. 여기서 그는 누드화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마르미지아노의 그림에 심취했다.
1903년 3월에 모디는 베니스로 옮겨 같은 계통의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유명한 미래파의 아르덴고 소피치와 움베르도 보치오니 같은 동료화가도 만났다. 남쪽의 태양과 예술을 찾아 온 북구의 처녀들을 사귀면서 젊은 카사노바같은 절제 없는 생활도 향유했다. 후에 베니스에서 배운 습성, 티치아노와 지오르지오네의 나체화들이 그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다.
1905년 돈을 대주던 외삼촌 아메데오 가르씨니가 죽자, 모디는 현대화의 메카인 파리로 향한다. 몽마르트에서의 모디의 삶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 때로는 몰래 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의 그림은 희귀하다. 파리에서의 삶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멕시코에서 온 리베라, 소련에서 온 수틴, 자크 립시츠, 키슬링, 막스 자콥과 주로 어울려 다녔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캔버스의 앞과 뒤 양면에 그림을 그리고 물감도 절약했던 때였다. 1908년에 그린 [누드공부]는 절망과 불안, 성적 충동과 갈망으로 초조한 화가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디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난다. 그의 새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다. 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음데 틀림없다. 여하튼 이 때에 그린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모디가 죽자 뒤를 따라 자살할 만큼 그를 사랑한 잔느 에뷰테른을 만난 것은 1917년 7월 어느 날이었다. 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 모디는 서른세 살이었다. 그들은 화가나 미술학도가 다니는 미술학교 아카데미 콜라르시에서 알게 되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디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착하고 순정적인 잔느는 술과 마약에 시달리는 모디와는 달리 절제된 생활을 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라로통드로 찾아가 만취한 남편을 찾아오곤 했다. 잔느와 함께 동거하면서도 모디가 다른 여자로부터 애까지 낳았지만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잔느는 1918년 11월 29일에 후에 커서 [모딜리아니라는 남자의 신화]란 전기를 쓴 딸 지오바니를 낳았는데, 시청에 출생신고를 하거 가던 모디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한 잔 한다는 것이 그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버려 그 날 결국 딸을 호적에 올리지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내닫고 있었다. 값싼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 영양상태는 엉망인데다가 술, 담배와 무절제한 생활은 그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의 방탕함을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도록 재촉했다. 모디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잔느는 속수무책인 채 넋나간 사람마냥 그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의사를 부를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방안에서 환자는 피를 토하며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고, 이젤엔 오일이 채 마르지 않은 바르고니의 초상이 미완성인 채 남겨져 있었다. 모디는 의식이 몽롱한 채, "나는 딸이 크는 것조자 보지 못하고 죽는다. 사랑하는, 내 사랑하는 이태리여! 내가 죽으면 잔느는 친구 수탄하고 살어"라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생전의 모디가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1920년 1월 24일 저녁 8시 50분에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다음날 아침, 죽은 남편의 시체를 보러 병원에 간 잔느는 오랫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시체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뒷걸음쳐 영안실을 나왔다. 겁이 난 그녀의 부모는 실신상태에 있는 잔느를 집에 데려다 오층 식모방에 가두어 놓고는 남동생 앙드레로 하여금 밤새 누나 곁은 떠나지 않고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잔느에게는 자살할 각오가 서 있었다. 결단은 되어 있었지만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다는 것이 두려운 그녀는 동생이 잠깐 조는 큼을 타 오층 창밖으로 임신 9개월의 몸을 내던졌다. 허공에서 날린 그녀의 몸은 무참하게 떨어져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잔느는 순결과 희생, 그리고 생명까지 던져 모디를 사랑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여인이었다.
모디의 장례식은 비참한 그의 생애에 비해 무척이나 화려했다. 온통 꽃에 파묻힌 그의 관이 실린 영구차의 뒤에는 파리의 유명한 모든 화가들이 뒤를 따랐다. 피카소, 데리앵, 우틸로, 작크 립시츠, 키슬링, 올티즈, 자라데, 부랑빙 ... 수도 헤아릴 수 없는 화가들이 페르 라쉐즈 묘지로 가는 슬픈 행렬을 이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