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로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매일 통학 했다...고등학교 3년
동안을............
새벽에 일어나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걸어서 종점에서 거의 빈차로
나오는 버스에 올라타면 버스 좌석이 너무나 차가웠다.
그리고 그 차가운 느낌이 뼈속까지 전해져 가끔은 서럽기도 했다.
그래도 두번째로 갈아타는 버스는 많은 같은 학교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덕에 자리 싸움도 치열했다.
노량진에서 거의 1시간을 더 가야 했으니까.....
문제는 토요일 하교때 였다.
아침를 6시쯤 먹고, 수업은 12시가 조금 넘어서 끝나고,
거의 모든 토요일에는 대청소를 했다.
그럼 1시..........1시쯤 버스에 올라타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3시가
넘었다.
분명 학교에 매점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소보로가 촘촘히 박힌
노을 이라는 빵도, 부드러운 카스테라 맛이 나는 보름달 빵도 팔고
있었지만, 난 주머니에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없었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에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타고, 1시간쯤 달려서
다른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노량진쯤에 내리면 노량진역 근처의
많은 노점상에 파는 떡볶기도, 핫도그도 너무나 유혹적 이였다
하지만, 그런것에 눈길을 줄 여유도, 교복을 입고, 군것질을 할 자신감도
없었다
집에 도착하면 거의 3시가 넘었다.
물론 집에는 엄마가 없었다. 그때 엄마는 토요일이면 조계사의
토요 법회에 가셨고, 집에는 치매가 있으신 할머니만 티브를 보시고
계셨다.
밥을 차려 먹을 기운조차 없어서, 분명 식탁위에 있던 식빵이나
군것질 거리로 적당히 요기를 마쳤던 기억이...
그리고 아, 내일은 학교 안 가서 좋다고 좋아 했던
기억이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 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지만 깨면 아무도
없어
(패닉의 달팽이....)
난 광명시에서 가락동까지 학교를 다녔다.
물론 나의 선택 이였고,
내 능력으로 갈수 있는 학교가 그곳 밖에 없었다.
덕분에 늘 잠은 부족하고, 제때 챙겨 먹을수도 없었다.
게다가 줄줄이 사탕처럼 많은 형제들 때문에 힘겨워 하시는 부모님에게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서, 정말 회수권 말고는 주머니에 동전하나 넣고
다닌적이 없다...
물론 지하철을 타면 조금은 시간을 절약 할수 있었지만 지하철 요금이
부담이 되었고, 회수권을 두장씩 받는 스쿨버스도 아까워서 타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다...나만 그렇게 산것이 아니고, 내 친구들도 그렇게 살았다
이제는 20년도 휠씬 넘은 그때의 시간들이 뭐 고생스러웠다거나
그렇게 지낸 시간이 억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끔 조그맣고, 삐적 마른 아이가 버스에서 2시간 넘게 서서
빈속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상기가 되면, 가슴이 조금 아리다.
꼬리글; 상고에 다녔는데,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집안 형편이
좋았다. 그래서 가끔 친구들이 놀려오면, 왜 이렇게
살면서 상고에 왔는가 물었다.
글쎄, 그것이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것 이라고
16살 아이는 생각 했다
동생이 출근 시간이 좀 걸린다고 부모님를 힘들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12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 나의 10대 시절이 생각이 나서
넋두리인지 궁상인지를 모를 글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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